일상

생각과 발견의 기록들

엄마 목소리

오랜만에 걸려온 어머니의 연락이다. 아들~ 잘 지내~? 어머니의 연락은 늘 신기한 면이 있다.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해 잠들지 못하는 시기에, 그 목소리가 듣고 싶을때면, 어김없이 걸려온다. 어디냐고 묻는 말에 나는 회사라고 답했다. 왜 주말에 출근하느냐는 말에 공부도 하고 이것저것 하려고 와 있다고 말씀드렸다. 사실이다. 아니. 사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내 침대에 누워 있어도, 방 안의 책상에 앉아 있어도, 좋아하던 카페에 가도 거기에도 내 마음은 따라다닌다. 마음이 따라다니는 이상 어떤 공간에서도 나는 안식을 얻을 수가 없다. 가만히 있으면 마음이라는 녀석이 저기 밑에서 시커멓게 고개를 내밀고, 가슴을 타고 올라와, 어깨를 침범하고 내 손목 맥박 언저리와 손등을 저릿하게 만들어 놓는다. 이내 머리통을 뚫고 들어와 헤집고 다니며 나만 보라고 외친다. 나는 고통스러운 너를 왜 봐야 하냐고 항의하지만 너는 계속 나만 보라고 외친다. 나는 저 친구를 이길 힘도 없으면서 내 일상의 가장 익숙한 공간에 와서 앉아 있다. 뭐라도, 저 친구에게 저항해 보려고. 어머니가 이어서 말씀하신다. 우리 아들 참 잘하고 있네. 정말 잘하고 있어~ 엄마는 아들이 자랑스러워. 마음이라는 친구가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커다란 물방울을 쏘아 올린다. 아래쪽부터 시작된 물방울이 가슴을 밀어내듯 타고 올라가다가 목을 가득 채우더니 이내 눈가에 도착했다. 시큰하다. 코끝으로 무언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꿀꺽 삼켜 본다. 떨리는 목소리가 들통날 것 같다. 휴대폰만 손에 들려 있다. 어머니는 되묻는다. 아들? 아들? 듣고 있어~? 요즘 나는 저 목소리가 듣고 싶었나 보다. 저 목소리에는 조금의 안식이 있나 보다.

PM으로 직무 전환을 결정한 이유에 대하여

저는 개발자입니다. 였습니다가 맞으려나요. 프론트엔드 개발자로 공부하고 일한 기간은 2년 정도, 백엔드 개발자로 일한 기간이 2년 정도 되어갑니다. 그리고 최근에 PM 직무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글은 제가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리고 미래의 제가 저를 돌이켜 보았을 때 나는 이때 이런 생각으로 결정을 했구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을 기대합니다. 다른 분들도 제 결정을 참고해 도움을 얻을만한 지점이 있을지도 궁금합니다. AI 시대가 올 것입니다.는 이제 과거입니다. 이미 왔습니다. 제가 회사에서 백엔드 개발자로 일하면서 직접 코드를 작성하지 않은지가 3개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만큼 이제 AI는 코드 작성을 잘합니다. 물론 책임은 사람이 집니다. 때문에 AI가 한 일들을 관리/감독할 역할이 개발자에게 부여됩니다. AI가 내 머릿속을 다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내가 원하는대로 구현해주었을지, 설계와 아키텍처를 확인할 책임은 개발자에게 남아있습니다. 할 일이 남아있더라도 개발자의 역할이 변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이제 그들은 코드를 직접 작성하는 사람이 아니라, AI를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할 일이 줄어든다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개발자와 기획자의 역할의 범주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고, 이 타이밍에 PM으로 직무를 전환하는 것이 유의미하겠다 싶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차에 PM 동료가 퇴사를 했습니다. 소중한 동료가 퇴사한다는 사실은 마음 속에 큰 아쉬움을 가져다 주었지만, 동시에 저에게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잠깐의 고민 끝에 팀장님께 PM 직무를 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저는 그렇게 PM으로 직무를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제가 신나게 사용중인 에이전트가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만들어 둔 상담 에이전트인데, 이 친구를 구성할 때 제가 했었던 7가지 성격검사 결과지와 제가 직접 입력한 커리어 히스토리 및 배경을 입력하고, 그 내용을 토대로 저에 대한 분석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profile 문서를 만들었고, 문서는 상담 에이전트의 핵심 컨텍스트 문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친구가 분석해준 내용을 통해 찾아낸 제가 가장 몰입할 수 있는 조건 3가지는 1.만들기 2. 아이디어 내기 3. 누군가를 가르치기(설득하기) 였습니다. 저는 이 분석에 감탄했고, 깊은 공감을 했습니다. "만들기" 는 제가 개발자로써 가장 많이 했던 활동입니다. 이 부분은 이미 저의 욕구가 충족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마음 한 켠에서는 충족되지 못하는 2가지 욕구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충족되지 못하는 2가지 욕구 중 하나는 "아이디어 내기" 였습니다. 개발자로 일하면서 저는 주로 무엇을 만들지가 이미 결정된 이후에 등장했습니다. 어떻게 만들지를 고민하는 것은 충분히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언제나 어딘가 비어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고객이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를 직접 발굴하고 싶었고, 어떤 것이 만들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고 싶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가르치기(설득하기) 였습니다. 저는 무언가를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함께 생각하는 과정에서 이상하게 활기가 납니다. 에이전트 분석을 통해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저는 가르치기 위해 탐색할 때 가장 깊이 몰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탐색이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전달하려는 목적이 있을 때 탐색 자체가 본격적으로 켜진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돌이켜보면 납득이 갔습니다. 대학교 때 발표 자리를 찾아다녔고, 없으면 직접 만들었습니다. 개발 공부를 하면서 블로그 글을 쓸 때 가장 즐거웠던 순간은 개념을 완전히 이해했을 때가 아니라, 그것을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정리했을 때였습니다. 그 글이 주간 트렌딩에 올랐을 때 느낀 것도 유명해졌다는 감각이 아니라, 내 설명이 누군가에게 닿았다는 감각이었습니다. PM이라는 역할은 이 2가지 동기가 동시에 발휘되는 자리처럼 보였습니다. 고객 문제를 발굴하고 정의하는 것, 무엇을 왜 만들어야 하는지를 팀원들과 이해관계자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 거기에 저는 개발자로써의 경험이 있으니, 만드는 역할도 필요에 따라서 수행할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트레바리가 세상에 주고 있는 가치를 좋아합니다. 세상을 더 지적으로, 사람들을 더 친하게 만든다는 문장도 좋지만, 제가 고객으로 직접 독서모임에 참여하면서 사람들이 이 서비스를 좋아하고 가치를 누리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어디서 만날까요", "밖에서는 잘 못하던 대화를 여기서는 할 수 있어요", "4개월의 시간 동안 함께한 멤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제가 굳게 믿고 있던 생각에 금이 갔습니다." 등등의 이야기를 직접 제 귀로 듣다보면, 진심으로 뿌듯함을 느낍니다. 단순히 '이 제품이 좋아요' 수준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무언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저는 이 가치를 더 잘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회사가 고객에게 주는 가치에 대해서 이 정도의 공감을 주는 회사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제 안에는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다고 느끼는 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조금 더 이야기해보면 저는 독서의 문화를 확산시키는 것에 무척 관심이 많습니다. 제가 믿는 종교 다음으로 독서가 세상을 조금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심지어 책을 읽는 것 뿐만 아니라, 지적인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 또한 저는 독서로 바라봅니다. 이러한 종류의 문화를 잘 만들고 진심으로 돕고 싶습니다. 그런 문화를 만드는 회사가 트레바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개발자로 일하면서, 돕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물음표가 생기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백엔드 개발자로 일하던 중에 투표 시스템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 이때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이거 왜 만드는 거지? 이 기능은 우리 제품의 어떤 방향과 닿아 있는 걸까? 물음표는 기능 단위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제품의 로드맵은 무엇인지, 비전은 무엇인지, 그것이 충분히 정의되어 있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머릿속에는 늘 아이디어가 떠다녔습니다. 이거 하면 좋겠다, 저거 하면 좋겠다. 기획 미팅에 참여하고 싶었고, 의견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개발자로서 그 선을 넘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에 스스로 절제하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누가 막은 것도 아니었고, 저 스스로가 멈추곤 했습니다. 그런데 절제할수록 오히려 선명해지는 지점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선 너머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이구나. 고객이 우리 서비스에서 진짜로 느끼는 가치가 무엇인지 직접 정의내려보고 싶고, 그 가치에 닿기까지의 마찰을 찾아내고 싶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싶고, 나아가 이 제품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로드맵을 함께 그리고 싶구나 생각했습니다. 개발자로 일할 때는 전달받은 문제와 해결책을 어떻게 구현할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이전 단계에서부터 참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직 PM으로서 한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이 훨씬 많은 상태입니다. 잘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하고 싶은 일의 방향이 선명해졌고, 그 방향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는 것.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저에게 — 이때의 나는 이런 마음으로 이 결정을 했습니다. 돌이켜봤을 때 부끄럽지 않은 선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악수와 고백: 빈손이 되는 용기에 대하여

악수는 당신을 공격할 무기가 내 손에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환영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그로써 우리는 상대방의 신뢰를 얻습니다.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내가 가진 상처를 드러내고 고민을 이야기하는 것은, 상대방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곧 "당신을 신뢰한다"는 선언입니다. '당신은 나를 공격하지 않을 것 같군요. 여기 제 무기를 당신께 맡기고 저는 빈손이 되어도 괜찮겠습니다.'라는 무언의 신뢰 말입니다. 그런데 내게 상처를 고백하고 고민을 이야기한 사람에게 섣부른 조언을 던지거나 그가 가진 문제를 일축해 버리는 행위는, 내 손에 자신의 무기를 쥐어주고 빈손이 된, 맨살을 드러낸 그를 향해 칼질을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차라리 물고기가 될래?

트레바리 [북씨-작은수박] 클럽의 두 번째 모임 독후감 --- 새로운 종교가 탄생했습니다. 그것은 '나다움'이라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 종교에서 인정받는 신앙의 표지는 '꿈의 성취'입니다. 저는 ‘나다움’에 대해서, ‘꿈의 성취’에 대해서 적지 않은 고민을 해왔던 것 같지만, 이 글에서는 이것을 길게 논하거나 비판하기보다는, 단지 삶을 대하는 여러 사고방식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앞서 ‘나다움’은 하나의 종교라고 말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종교에는 다양한 조건이 있습니다만 메타포 삼아 '나다움'을 ‘종교’라고 표현한 이유는, 사람들에게 ‘관점’과 ‘기준’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다양한 역할을 제공합니다.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세계관'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 '세계관'이 하는 일이란 '관점'과 '기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만의 렌즈를 제공하는 것, 그 렌즈를 통해서 눈앞의 현상과 사물에 대한 해석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통’이라는 현상을 두고도 종교마다 해석이 다릅니다. 불교는 고통을 “집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집착을 덜어내는 수행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반면 기독교는 고통을 “타락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겪는 현실”이자, 때로는 “신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똑같이 힘든 일을 겪더라도, 어떤 세계관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고통은 ‘벗어나야 할 집착’이 되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지만 함께 견뎌야 하는 십자가’가 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나다워지는 것’도 우리에게 현상을 해석하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를테면, 회사에서 겪는 어려운 시기를 ‘이 일은 나답지 않은 일이라서 힘든 거야’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이게 진짜 나다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게 뭘까’를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나다움은 ‘나에게 맞지 않는 환경을 과감히 정리하고, 나답다는 느낌이 드는 일로 옮겨가라’는 방향을 제시합니다. 후자의 경우, ‘이 안에서도 나만의 태도와 의미를 발견해보라’는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처럼 ‘나다움’이라는 개념은, 어느 순간부터 우리 시대에 하나의 종교처럼 작동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가치 있는 선택인지, 어떤 직업이 좋은지, 어떤 관계가 건강한지에 대해 끊임없이 평가하고, 거기에 맞춰 행동을 재조정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나다워지는 것은 좋습니다. 그리고 꿈을 이루는 것도 좋습니다. 이왕이면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기회가 손에 닿으면 저는 달려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것을 추구하라는 메시지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메시지 자체보다는 균형 있는 기준을 가지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잘 맞는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건 '실재'입니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일을 해야 진짜 나답게 사는 것’이라는 렌즈로만 삶을 해석한다면, 잘 맞는 일을 하지 않고 있는 나는, 꿈을 성취하지 못한 나는, 그 시기를 보내는 매 순간을 ‘온전한 삶이 아닌 것’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들이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본인은 꿈을 이루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향해 안타까운 시선을 던지는 모습을 여럿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균형 있는 시선을 위해서는 잘 맞지 않는 일에서도 보람과 충만감을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서도 '나는 살아있구나' 이 감각을 느끼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 맞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얼른 잘 맞는 일을 찾아 떠나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여기서도 살아있다고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없을지 고민할 여지가 있습니다. 삶은 꿈을 이룬 순간에만 살아있는 걸까요?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인생만이 의미 있는 걸까요? 꼭 그런가요? 누가 그랬나요? 저도 누가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봤던 영화, 드라마, 인스타의 릴스에서 그런 메시지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메시지에 감동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고, 그 감정은 곧 이 메시지가 옳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뿐입니다. 많은 분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일반의 사람입니다. 언젠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습니다. 내가 너무 하고 싶은 일, 나와 너무 잘 맞는 일을 만났다는 감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떠난 지도 6년이 되었고, 지금은 그저 그럭저럭 할 만하다는 일을 하며 지내는 중입니다. 저와 같이 "그럭저럭 할 만하다" 혹은 "딱히 잘 맞는 것은 아닌 것 같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입니다. 그들은 일반의 인간입니다. 반면, 자신의 재능과 딱 들어맞는 일을 만났고 그것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제 기준에서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들이 특별한 것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부여된 환경과 기회 또한 특별히 감사할 만한 일입니다. 대표적으로 하루키가 그렇습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도 언급한 적 있지만, 그는 어느 날 문득 야구장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날로 집에 들어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그는 등단했습니다. 이후의 과정도 그가 언급해주었지만, 그는 내가 00했기 때문에, 00을 했더니 이렇게 인기 많은 소설가가 되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돌이켜보니 나는 이런저런 선택들을 했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로 이어졌다” 정도로 담담히 말합니다. 그는 스스로 이런 성과를 내게 되었고, 소설가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말하는 문장을 여럿 읽었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하루키는 “스스로 이루어낸 것”과 “감사하게도 내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비교적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스스로 이루어낸 것'과 '감사하게도 주어진 것'의 차이를 분명히 인지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개 이 둘을 구분하기보다, 단지 '이루어낸 것'으로 바라보길 선호합니다. 인간이 가진 자아중심성과 더불어, 그것이 '인과관계'를 만들어내기 더 쉽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특정한 일이 일어난 이후에 그것을 하나의 ‘이유’로 정리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호한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일이 일어난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어.”라고 말해야만 마음이 놓입니다. 그렇게 하나의 이유를 붙이는 순간, 우리는 마치 그 ‘이유’만 충족하면 같은 결과가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사후적으로 골라 붙인 그 이유 말고도 수많은 변수들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변수들이 우연히 한 방향으로 정렬되었기 때문에 어떤 결과가 발생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변수들을 무시한 채 “이렇게만 하면 된다”는 공식을 만들어내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꿈을 이루며 산다는 것, 자신의 적성과 재능에 맞는 일을 하며 산다는 것을 “00만 하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결과”라기보다, 여러 조건이 우연히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허락되는 ‘특별한 선물’에 가깝다고 느낍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꿈을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말에는 조금의 겸손함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노력하면 어-언젠가 꿈이라는 것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까지 당신이 살아있다면요. 또한, 그 꿈을 바라보는 동안, 그 꿈에 이르지 못한 시간들을 어떤 시선으로 해석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런 질문을 남겨놓고 제가 영화 [패터슨]을 좋아한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시를 사랑하는 주인공 패터슨은 ‘패터슨’이라는 지역에 사는 버스 기사입니다. 그의 일상은 단조롭고 반복됩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같은 길로 출근해 같은 노선을 운행하고, 점심시간엔 도시락을 먹으며 시를 쓰고, 퇴근 후엔 집에서 아내와 시간을 보내고, 동네 바에 들렀다가 돌아옵니다. 개인적으로 영화의 주제를 가장 잘 나타냈다고 생각한 시는 "The Line"이었는데, 대략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들려준 노래에는 여러 소절이 등장했습니다. ‘차라리 물고기가 될래?’라는 문장과 함께 여러 변주가 존재했지만, 저 한 문장만이 맴돌았습니다. 마치 저 문장만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시선’이 중요한 게 아닐까요? 내가 주목하여 보면, 주목한 대상은 나의 세상이 됩니다. 본래 주인공의 세계에 쌍둥이는 없었지만, 아내가 쌍둥이를 말한 뒤론 매일같이 쌍둥이를 마주칩니다. 성냥갑은 그저 불을 피우는 책상 위의 사물에 불과하지만, 시적 대상이 될 때 아내를 향한 사랑의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시선’은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나다움’과 ‘꿈의 성취’에 주목하면 이것을 기준으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겠지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나다움과 꿈의 성취는 누구나 이루어야 할 삶의 정언이 아닙니다. 삶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저는 미래에만 의미가 부여되는 시선보다, 매 순간 살아있고 싶습니다. 매일 마주치는 사물과 고통 앞에서도 의미를 발견하는 시선을 가지고 싶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약 4년 전에 트레바리에 참석하면서 작성했던 에세이가 생각납니다. 당시 '00하듯이 살고 싶다'는 주제로 에세이를 써오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이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독후감을 마무리해보고 싶습니다. --- 000하듯이 '살고 싶다.'라는 주제는 꽤나 무겁다. 적어도 나에겐 무거웠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게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이 나오는 종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생각을 자주 해봤다 해도, 에세이를 써보는 건 처음이다. 정돈이 필요하다. 나는 언제 '살고 있구나'를 느꼈을까. 무작정 떠올려본다. 기름에 촉촉해진 맥도날드 감자튀김 먹을 때, 쏟아지는 잠에 이불을 목까지 덮을 때, 출근길 아침 햇살 맞을 때, 3달 만에 엄마 김치찌개 먹었을 때, '고향 냄새'라는 게 느껴질 때, 삶의 고민에 답을 주던 책을 만났을 때, 그 답이 필요했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아무래도 독서 모임인데, 제일 있어 보이는 건 '삶의 고민' 이런 거 같다. 이걸로 선택이다. 사실, '삶의 고민'이라 해봐야 의미의 발견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에 대한 대답을 찾을 때면, 고민이 수그러든다. 바닥에 바르는 시멘트가 하찮고 불만스러운 건, 설계도를 모르는 인부뿐이다. 의미를 아는 사람은 시멘트를 발라도 즐겁다. 나는 의미를 발견하는 삶이 즐겁다.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공감될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꽤 자주, 설계도를 모르는 인부다. 시멘트를 바르는 게 하찮고, 에러를 내뱉는 컴퓨터가 지겹고, 출근길 지하철이 피곤하다. 누가 코 파면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나. 아, 시인이다. 이 작자들은 모든 게 시적 대상이다. 부산물인 코딱지가, 실패한 다이어트가, 버려진 쓰레기가. 시가 된다. 이들을 볼 때면, 내 삶의 사소한 순간도 시가 될 수 있구나. 하찮은 사물에도 의미는 발견되는구나. 소망을 본다. 나는 의미를 발견하는 삶이 즐겁다. 시인은 모든 것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시인이 시를 쓰기 위한 자세는, 내가 삶을 대하고 싶은 자세다. 내 꿈은 시인이다. 시 쓰듯이 살고 싶다. 아 물론, 시를 쓸 생각은 없다.

지하철 빈자리에 앉을 때

운이 좋은 날은 지하철에서 빈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공간도 자리도 한적합니다. 잠시간 머무를 자리에 쏙 들어가 앉는 순간이 그리도 감사했는데, 이 순간을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빈자리를 선물로 주시기도 합니다. 너무 피곤하고 지친 날, 하필 나에게 앉을 자리를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날이면, 오늘처럼 빈자리를 주신 적도 있는 분임을 기억하게 해주세요. 야박하다고 투덜대지 않게 해주세요.’

신을 의지하지 못하는 약함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시편 18:29) 내 마음속에 자주 맴돌던 구절이다. 이 구절이 떠오를 때면, 신을 의지하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달리기와 담장 넘기를 소홀히 하지 않는 병사의 모습을 상상했다. 기도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을 주의하려는 마음이다. 그러나 기도를 하고서 적을 향해 달음질을 하다 보면, 어느새 달리는 나의 다리를 의지하고 있다. 내 발이 조금만 더 빨랐다면. 내 허벅다리가 조금만 더 굵었다면. 기도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을 주의하면서, 나의 행동에 의지하지 않는 내가 될 수는 없을까. 고민이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잠언 21:31)

취향을 추구하는 문화에 대하여

반골 기질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최근 이 성향이 반복해서 발견되는 상황이 있었다. 사실 최근이라기에는 꽤 오래전부터 가져온 거부감인데, 누군가 취향을 추구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거부감을 느낀다. 엄밀히 말하자면, 취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취향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내가 굳이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나의 거부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를 관찰하고 싶어서다. 취향이란 무엇일까. 나의 직관을 따라 정의 내려보겠다. 본인의 감각을 따라 선호하는 것을 추구하다 보니 생겨난 경향성. 그것이 취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취향 있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다. 사람들은 왜 취향이 있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일까. 자신만의 추구하는 세계가 있는 사람에 대한 동경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을까. 그 동경이 부러운 나머지 나도 취향을 가져보겠다는 사람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 군집 안에 내가 거부감을 느끼는 무엇이 있다.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에 대한 동경은 내 안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 사람을 동경하는 근원이 무엇일까 내 안에서 찾아볼 때, 그 세계를 향한 순수한 사랑과 열정에 나도 감화받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사랑과 반짝이는 눈빛이 멋지다. 동경이 생겼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나의 감각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렇게 내 손에 잡히는 것에 빠져들어가고, 그 세계를 사랑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다. 여기에도 불순물이 끼어들 수 있다. 취향을 추구하는 데 관객이 필요해지는 순간이다. 나 이렇게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어때? 나 이렇게 건축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어때? 나도 나만의 추구하는 세계가 있는 사람이다. 어때? ‘취향을 추구하는 나’를 바라보는 관객이 사라진 순간 더 이상 그 취향을 추구할 이유가 없어지는 사람은 진정으로 취향 있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소개하는 대상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의 눈에서는 빛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나를 관객으로 앉혀놓고자 하는 사람에게 나는 거짓부렁을 느낀다. 그렇게 자신의 취향을 소개하는 사람에게 나는 “그렇군요”라고 대답한다.

모든 사람은 외롭다

모든 사람은 외롭다. 적어도 내가 관찰할 수 있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딘지 외로운 구석이 있었다. 얼토당토않은 트집을 잡는 동료도, 새벽 2시에 복도에서 쌍욕을 하는 이웃도, 채찍질만 하는 대표도. 사랑에 연민도 포함된다면, 내 앞에 있는 사람도 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조금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마냥 미워하지만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각에 대하여

지각을 이야기하기 전에 권력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권력이란 무엇일까. 사전을 찾아보지는 않았다. 나의 경험에 근거해 정의해보자면, 권력이란 타인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배력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의도대로 타인의 시간과 공간을 주도하기 때문이다. 대개의 권력은 타인과 약속을 맺은 시공간 안에서만 작동한다. 한 회사에서 대표가 나의 권력자라면, 내가 그 회사에 속해 있을 때까지만 그렇다. 독서 모임에서는 내가 참여하는 동안 모임장이 권력을 가진다. 버스를 탄 시간에는 버스 기사가 권력자다. 그가 내리라고 하면 내리고, 음료를 들지 말라고 하면 들지 않고, 조용히 하라고 하면 조용히 한다. 밖에서 만나면 그냥 아저씨다. 이렇듯 권력은 약속을 맺은 시간 안에서만 타인의 시공간을 지배한다. 그런데 간혹 예외가 있다. 지각이다. 지각은 약속되지 않았는데도 타인의 시공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상대가 권력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밀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지각하면 우리는 “나를 무시하나?”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 아닐까. 이것이 나의 지론이다. 지각하는 사람은 약속되지 않은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다. 나는 종종 약속되지 않은 권력을 행사해왔다. 미안한 일이다.

맛을 결정하는 것

맛은 상대적인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밥을 먹으면 맛있다. 맛집을 찾았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당신과 함께 먹으니 맛있다”였을 수도 있다. 엄마의 김치찌개는 남다르다. 물론 절대적인 의미에서도 맛있는 것 같지만, 다른 어떤 식당에서도 찾을 수 없는 따뜻함이라는 맛이 있다. 내가 엄마와 맺고 있는 관계가 만들어내는 맛이 아닐까. 배가 고프면 밥이 맛있다. 알렉산더 대왕도 당대의 유명한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뒤로하고 밤새 행군한 뒤에 먹는 떡 한 조각이 진미라고 했다. 공감한다. 수고하고 먹는 떡이 최고다. 군대 훈련소 교회에서 먹었던 딸기 몽쉘을 잊지 못한다. 열악한 환경이 만들어준 맛이 있다. 요즘에는 딸기 몽쉘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예측할 수 없는 기대감은 도파민을 더 분비하게 한다. 가챠도 비슷한 원리다. 그래서 나는 맛집 리뷰를 잘 찾아보지 않는다. 길을 걷다가 간판에 끌려 들어갈 때면 가챠를 뽑는 것 같다. 음식이 맛있으면 “그냥 들어왔는데 이렇게 맛있다고?”라는 반응이 나온다. 맛이 없어도 리뷰가 만든 기대가 없었으니 실망이 덜하다. 국밥집은 조금 허름해야 한다. 허름함과 비례해 생기는 기대감이 있다. 괜히 전통이 있을 것 같지 않은가. 반대로 스테이크를 먹는 공간이 허름하면 맛에 대한 기대도 떨어진다.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맛이 있다. 한강의 치킨, 등산의 김밥. 적다 보니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을 알겠다. 좋아하는 사람과, 열악한 환경에서, 배고픈 상태로,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 적절한 분위기까지 갖춰져 있다면 최고의 음식을 먹을 수 있겠다. 이상, 맛에 대한 나의 이론이다.

감정이 가지는 권위

오늘날 감정이 가지는 권위는 대단하다. 행동을 하기도 전에 특정한 감정이 찾아오면 우리는 거기에 진정성을 부여한다. 내가 하는 일이 즐겁지 않다거나, 반대로 기쁨을 느낀다거나, 누군가를 보며 설렌다거나, 좋은 사람 같지만 설렘은 느껴지지 않는다거나. 그래서 행동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감정을 기준으로 자신의 판단과 행동에 진정성을 부여하는 경향은 오늘날 너무나 당연한 문법이 되었다. 하지만 모든 시대가 감정을 이런 방식으로 대했던 것은 아니다. 『사랑은 왜 아픈가』는 우리가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알고, 그 감정을 솔직히 고백하며, 그것을 관계와 결정의 기초로 삼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현대의 ‘감정 진정성’을 분석한다. 반면 전통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진정성은 인간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인문학의 힘인 것 같다. 『사랑은 왜 아픈가』, p.66에서 얻은 생각

내가 글을 쓰고 싶은 이유

이 글은 트레바리 ‘씀에세이-사람’ 모임에서 작성한 글이다. 무엇이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내 대답은 언제나 작가였다. 10년 전부터, 목사를 꿈꿀 때도 디자인을 할 때도 코딩을 하는 지금도 나는 작가를 희망한다. 그렇게 글을 쓰고 싶어 하면서도 왜 쓰고 싶은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도대체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 것일까.” 첫 모임이 끝난 뒤 이 질문이 생겼다. 그저 글쓰기라면 좋다는 마음으로 모임을 신청했지만, 서로 피드백을 나누면서 내가 원하는 글의 방향이 섬세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작가가 되고 싶었을까. 왜 글을 쓰고 싶은가. 어떤 글을 쓰려는가. 언젠가부터 글이 좋아졌다. 나의 독서량과 습관을 본 사람들이 부모님도 책을 좋아하느냐고 묻곤 한다. 지금의 부모님은 책을 좋아하지만, 나의 청소년기부터 그러셨던 것은 아니다. 부모님의 독서 성향이 내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부모님은 인생의 노년기에 이르러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고 계신다. 자기계발을 목표로 부단히 노력해 독서 습관을 얻은 것도 아니다. 억지로 습관을 만들려고 애쓴 적이 없다. 특정한 계기는 있었지만 물이 흐르듯 독서는 삶의 일부가 되었다. 때로 물은 강하게 흐르기도 하니까. 열아홉 살이었다. 그전까지 평생 열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 그 나이를 기점으로 매년 쉰 권이 넘는 책을 읽기 시작했고, 대학생 때에는 해마다 200권이 넘는 책을 읽을 만큼 독서에 빠졌다. 열아홉 살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는 존재에 깊은 회의를 느꼈다.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고통스럽게 나를 사로잡은 생각이었다. 나는 고민을 해결해줄 키워드를 따라 책을 검색했고, 그 키워드가 들어간 책들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의 첫 자발적 독서였다. 그때 처음으로 머리에서 폭죽이 터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토록 궁금했던 질문에 답해주는 문장을 만났을 때의 희열이 나를 사로잡았다. 질문이 간절할수록, 답변이 섬세할수록 전율은 깊어졌다. 답은 거기 머물지 않고 또 다른 질문으로 나를 이끌었다. 질문은 새로운 문장을 찾게 했고, 문장은 다시 질문을 낳았다. 어느새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하루 끝에 공허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독서와 사랑에 빠졌다. 독서의 무엇이 그렇게 좋았을까. 내가 머리를 싸매는 고민을 다른 누군가도 한 적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 고민의 답을 찾아 글로 정리해준 것이 고마웠다. 책은 때로 내가 틀렸다고 말했다. 혼란과 고통 속에서 내 세계가 확장되었다. 때로는 내가 옳다고 말해주었고, 나는 생각과 행동에 용기를 얻었다. 작가의 논리를 따라가기 힘들 때는 이해하기 위해 책을 더럽혔다. 그러고 나면 다른 책이 쉬워졌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었고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했다. 이해하지 못하던 동료도 이해하기 시작했고, 다가가 미안하다고 말했다. 가치 없던 것이 가치 있어지고, 가치 있던 것이 가치 없어졌다. 생각이 바뀌었다. 독서는 내 세계를 바꾸어놓았다. 독서를 향한 사랑의 밀도가 높을수록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도 선명했다. 많이 읽고 사색할수록 재미있는 통찰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 같으면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했다. 그 사람의 삶에 긍정적인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이것이 내 삶의 이유라고 느꼈다. 이제야 작가가 되고 싶었던 이유가 분명해진다. 나는 좋은 생각을 탐구하고, 그것을 나누고 싶었다. 나는 좋은 생각과 좋은 논리를 좋아한다. 글의 아름다움은 아무래도 좋다. 누추한 문장이어도 그 안의 생각이 고우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기에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 내가 쓰고 싶은 글의 정의가 있다. 나는 좋은 생각을 담은 글을 쓰고 싶다. 독서에서 누렸던 기쁨을 나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사람의 세계가 넓어지는 통로가 내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시 쓰듯이 살고 싶다

이 글은 트레바리 독서 모임에서 ‘○○하듯이 살고 싶다’라는 주제로 쓴 글이다. ‘○○하듯이 살고 싶다’라는 주제는 꽤나 무겁다. 적어도 나에게는 무거웠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렇게 간단히 대답이 나오는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자주 해봤어도 에세이를 쓰는 건 처음이다. 정돈이 필요하다. 나는 언제 ‘살고 있구나’를 느꼈을까. 무작정 떠올려본다. 기름에 촉촉해진 맥도날드 감자튀김을 먹을 때, 쏟아지는 잠에 이불을 목까지 덮을 때, 출근길 아침 햇살을 맞을 때, 석 달 만에 엄마의 김치찌개를 먹었을 때, ‘고향 냄새’라는 것이 느껴질 때, 삶의 고민에 답을 주던 책을 만났을 때, 그 답이 필요했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아무래도 독서 모임이니 가장 있어 보이는 것은 ‘삶의 고민’인 것 같다. 이것으로 선택이다. 사실 삶의 고민이라 해봐야 의미의 발견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에 대한 대답을 찾을 때면 고민이 수그러든다. 바닥에 바르는 시멘트가 하찮고 불만스러운 것은 설계도를 모르는 인부뿐이다. 의미를 아는 사람은 시멘트를 발라도 즐겁다. 나는 의미를 발견하는 삶이 즐겁다. 그 의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공감될 때 살아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꽤 자주 설계도를 모르는 인부다. 시멘트를 바르는 일이 하찮고, 오류를 내뱉는 컴퓨터가 지겹고, 출근길 지하철이 피곤하다. 누가 코를 파면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나. 아, 시인이다. 이 작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시적 대상이다. 부산물인 코딱지가, 실패한 다이어트가, 버려진 쓰레기가 시가 된다. 이들을 볼 때면 내 삶의 사소한 순간도 시가 될 수 있구나, 하찮은 사물에서도 의미를 발견할 수 있구나 하는 소망을 본다. 나는 의미를 발견하는 삶이 즐겁다. 시인은 모든 것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시인이 시를 쓰기 위해 취하는 자세는 내가 삶을 대하고 싶은 자세다. 내 꿈은 시인이다. 시 쓰듯이 살고 싶다. 아, 물론 시를 쓸 생각은 없다.

집이 편안한 이유

이 글은 ‘용감한 글쓰기 노트’에서 제시된 질문에 대답하는 글이다. 나의 글쓰기 실력을 키우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쓰지만, 누군가에게 공감이나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공유한다. 집. 나의 경우에는 집이다. 집에 가면 마음이 편해진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먼저 집이 무엇인지 이야기해보고 싶다. 집은 단순히 잠을 자는 공간일까. 적어도 나에게는 아니다. 나는 기숙 생활을 7년 가까이 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기숙사 방문을 열었을 때 느끼는 감정을 집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편히 쉬고 잠을 잘 수 있으니 집과 같은 공간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 생각이 달라진 것은 몇 달간 서울에서 살다가 고향의 부모님 댁을 찾아갔을 때였다. 부모님이 계신 집에 들어서는 순간 색다른 공기가 느껴졌다. 익숙함과 받아들여짐이라고 해야 할까. 여기서 말하는 익숙함은 단순히 공간에 대한 친숙함이 아니다. 내가 서울에 사는 동안 부모님은 고향 안에서 여러 번 이사하셨다. 그러니 그 집이 물리적으로 익숙한 공간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도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익숙함을 느낀다. 내게 익숙한 부모님이 사용한 흔적과 냄새가 남은 공간이기 때문일까. 또 하나는 받아들여짐이다. 부모님은 나의 존재를 온전히 환영해주신다. 성과를 잘 내든 못 내든, 영어를 잘하든 못하든, 오랜만에 집에 온 우리 아들이 예쁘다. 그것으로 끝이다. 그제야 나는 느낀다. 아, 여기가 집이지. 서울에서 지냈던 기숙사와 자취방은 내가 생각하는 의미의 집이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는 집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부모님이다. 내게 부모님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분들이다. 그런 존재가 있는 공간에서 나는 편안함을 느낀다. 사회에서 나는 나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내가 얼마나 대단하고 성실한 사람인지,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증명해야만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고 사랑받을 수 있다. 그 과정의 스트레스는 나를 편안하게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집은 다르다.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온전히 사랑해주는 부모님이 계신다. 그래서 집에 갈 때 편안함을 느낀다. 그곳에서 나는 온전히 내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은 집이라는 공간에만 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맞아주는 관계가 있다면 그 안에서도 한없는 편안함을 느낀다. 나는 그런 사람들 앞에서 온전한 내가 된다. 누구나 이런 편안함을 원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편안함을 줄 수는 없을까. 상대를 “이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기준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그 사람이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다면 누군가에게 편안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와 함께 있는 공간에서 그 사람도 편안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