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물고기가 될래?
꿈의 성취보다 매 순간 의미를 발견하는 시선에 대하여
트레바리 [북씨-작은수박] 클럽의 두 번째 모임 독후감
새로운 종교가 탄생했습니다. 그것은 '나다움'이라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 종교에서 인정받는 신앙의 표지는 '꿈의 성취'입니다. 저는 ‘나다움’에 대해서, ‘꿈의 성취’에 대해서 적지 않은 고민을 해왔던 것 같지만, 이 글에서는 이것을 길게 논하거나 비판하기보다는, 단지 삶을 대하는 여러 사고방식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앞서 ‘나다움’은 하나의 종교라고 말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종교에는 다양한 조건이 있습니다만 메타포 삼아 '나다움'을 ‘종교’라고 표현한 이유는, 사람들에게 ‘관점’과 ‘기준’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다양한 역할을 제공합니다.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세계관'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 '세계관'이 하는 일이란 '관점'과 '기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만의 렌즈를 제공하는 것, 그 렌즈를 통해서 눈앞의 현상과 사물에 대한 해석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통’이라는 현상을 두고도 종교마다 해석이 다릅니다. 불교는 고통을 “집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집착을 덜어내는 수행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반면 기독교는 고통을 “타락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겪는 현실”이자, 때로는 “신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똑같이 힘든 일을 겪더라도, 어떤 세계관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고통은 ‘벗어나야 할 집착’이 되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지만 함께 견뎌야 하는 십자가’가 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나다워지는 것’도 우리에게 현상을 해석하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를테면, 회사에서 겪는 어려운 시기를 ‘이 일은 나답지 않은 일이라서 힘든 거야’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이게 진짜 나다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게 뭘까’를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나다움은 ‘나에게 맞지 않는 환경을 과감히 정리하고, 나답다는 느낌이 드는 일로 옮겨가라’는 방향을 제시합니다. 후자의 경우, ‘이 안에서도 나만의 태도와 의미를 발견해보라’는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처럼 ‘나다움’이라는 개념은, 어느 순간부터 우리 시대에 하나의 종교처럼 작동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가치 있는 선택인지, 어떤 직업이 좋은지, 어떤 관계가 건강한지에 대해 끊임없이 평가하고, 거기에 맞춰 행동을 재조정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나다워지는 것은 좋습니다. 그리고 꿈을 이루는 것도 좋습니다. 이왕이면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기회가 손에 닿으면 저는 달려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것을 추구하라는 메시지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메시지 자체보다는 균형 있는 기준을 가지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잘 맞는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건 '실재'입니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일을 해야 진짜 나답게 사는 것’이라는 렌즈로만 삶을 해석한다면, 잘 맞는 일을 하지 않고 있는 나는, 꿈을 성취하지 못한 나는, 그 시기를 보내는 매 순간을 ‘온전한 삶이 아닌 것’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들이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본인은 꿈을 이루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향해 안타까운 시선을 던지는 모습을 여럿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균형 있는 시선을 위해서는 잘 맞지 않는 일에서도 보람과 충만감을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서도 '나는 살아있구나' 이 감각을 느끼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 맞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얼른 잘 맞는 일을 찾아 떠나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여기서도 살아있다고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없을지 고민할 여지가 있습니다. 삶은 꿈을 이룬 순간에만 살아있는 걸까요?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인생만이 의미 있는 걸까요? 꼭 그런가요? 누가 그랬나요? 저도 누가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봤던 영화, 드라마, 인스타의 릴스에서 그런 메시지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메시지에 감동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고, 그 감정은 곧 이 메시지가 옳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뿐입니다. 많은 분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일반의 사람입니다. 언젠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습니다. 내가 너무 하고 싶은 일, 나와 너무 잘 맞는 일을 만났다는 감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떠난 지도 6년이 되었고, 지금은 그저 그럭저럭 할 만하다는 일을 하며 지내는 중입니다. 저와 같이 "그럭저럭 할 만하다" 혹은 "딱히 잘 맞는 것은 아닌 것 같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입니다. 그들은 일반의 인간입니다.
반면, 자신의 재능과 딱 들어맞는 일을 만났고 그것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제 기준에서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들이 특별한 것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부여된 환경과 기회 또한 특별히 감사할 만한 일입니다. 대표적으로 하루키가 그렇습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도 언급한 적 있지만, 그는 어느 날 문득 야구장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날로 집에 들어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그는 등단했습니다. 이후의 과정도 그가 언급해주었지만, 그는 내가 00했기 때문에, 00을 했더니 이렇게 인기 많은 소설가가 되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돌이켜보니 나는 이런저런 선택들을 했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로 이어졌다” 정도로 담담히 말합니다. 그는 스스로 이런 성과를 내게 되었고, 소설가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말하는 문장을 여럿 읽었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하루키는 “스스로 이루어낸 것”과 “감사하게도 내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비교적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스스로 이루어낸 것'과 '감사하게도 주어진 것'의 차이를 분명히 인지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개 이 둘을 구분하기보다, 단지 '이루어낸 것'으로 바라보길 선호합니다. 인간이 가진 자아중심성과 더불어, 그것이 '인과관계'를 만들어내기 더 쉽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특정한 일이 일어난 이후에 그것을 하나의 ‘이유’로 정리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호한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일이 일어난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어.”라고 말해야만 마음이 놓입니다. 그렇게 하나의 이유를 붙이는 순간, 우리는 마치 그 ‘이유’만 충족하면 같은 결과가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사후적으로 골라 붙인 그 이유 말고도 수많은 변수들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변수들이 우연히 한 방향으로 정렬되었기 때문에 어떤 결과가 발생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변수들을 무시한 채 “이렇게만 하면 된다”는 공식을 만들어내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꿈을 이루며 산다는 것, 자신의 적성과 재능에 맞는 일을 하며 산다는 것을 “00만 하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결과”라기보다, 여러 조건이 우연히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허락되는 ‘특별한 선물’에 가깝다고 느낍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꿈을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말에는 조금의 겸손함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노력하면 어-언젠가 꿈이라는 것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까지 당신이 살아있다면요. 또한, 그 꿈을 바라보는 동안, 그 꿈에 이르지 못한 시간들을 어떤 시선으로 해석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런 질문을 남겨놓고 제가 영화 [패터슨]을 좋아한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시를 사랑하는 주인공 패터슨은 ‘패터슨’이라는 지역에 사는 버스 기사입니다. 그의 일상은 단조롭고 반복됩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같은 길로 출근해 같은 노선을 운행하고, 점심시간엔 도시락을 먹으며 시를 쓰고, 퇴근 후엔 집에서 아내와 시간을 보내고, 동네 바에 들렀다가 돌아옵니다.
개인적으로 영화의 주제를 가장 잘 나타냈다고 생각한 시는 "The Line"이었는데, 대략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들려준 노래에는 여러 소절이 등장했습니다. ‘차라리 물고기가 될래?’라는 문장과 함께 여러 변주가 존재했지만, 저 한 문장만이 맴돌았습니다. 마치 저 문장만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시선’이 중요한 게 아닐까요? 내가 주목하여 보면, 주목한 대상은 나의 세상이 됩니다. 본래 주인공의 세계에 쌍둥이는 없었지만, 아내가 쌍둥이를 말한 뒤론 매일같이 쌍둥이를 마주칩니다. 성냥갑은 그저 불을 피우는 책상 위의 사물에 불과하지만, 시적 대상이 될 때 아내를 향한 사랑의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시선’은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나다움’과 ‘꿈의 성취’에 주목하면 이것을 기준으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겠지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나다움과 꿈의 성취는 누구나 이루어야 할 삶의 정언이 아닙니다. 삶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저는 미래에만 의미가 부여되는 시선보다, 매 순간 살아있고 싶습니다. 매일 마주치는 사물과 고통 앞에서도 의미를 발견하는 시선을 가지고 싶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약 4년 전에 트레바리에 참석하면서 작성했던 에세이가 생각납니다. 당시 '00하듯이 살고 싶다'는 주제로 에세이를 써오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이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독후감을 마무리해보고 싶습니다.
시 쓰듯이 살고 싶다
000하듯이 '살고 싶다.'라는 주제는 꽤나 무겁다.
적어도 나에겐 무거웠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게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이 나오는 종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생각을 자주 해봤다 해도, 에세이를 써보는 건 처음이다.
정돈이 필요하다.
나는 언제 '살고 있구나'를 느꼈을까.
무작정 떠올려본다.
기름에 촉촉해진 맥도날드 감자튀김 먹을 때,
쏟아지는 잠에 이불을 목까지 덮을 때,
출근길 아침 햇살 맞을 때,
3달 만에 엄마 김치찌개 먹었을 때,
'고향 냄새'라는 게 느껴질 때,
삶의 고민에 답을 주던 책을 만났을 때,
그 답이 필요했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아무래도 독서 모임인데, 제일 있어 보이는 건 '삶의 고민' 이런 거 같다.
이걸로 선택이다.
사실,
'삶의 고민'이라 해봐야 의미의 발견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에 대한 대답을 찾을 때면, 고민이 수그러든다.
바닥에 바르는 시멘트가 하찮고 불만스러운 건,
설계도를 모르는 인부뿐이다.
의미를 아는 사람은 시멘트를 발라도 즐겁다.
나는 의미를 발견하는 삶이 즐겁다.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공감될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꽤 자주, 설계도를 모르는 인부다.
시멘트를 바르는 게 하찮고, 에러를 내뱉는 컴퓨터가 지겹고, 출근길 지하철이 피곤하다.
누가 코 파면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나.
아, 시인이다.
이 작자들은 모든 게 시적 대상이다.
부산물인 코딱지가, 실패한 다이어트가, 버려진 쓰레기가.
시가 된다.
이들을 볼 때면,
내 삶의 사소한 순간도 시가 될 수 있구나.
하찮은 사물에도 의미는 발견되는구나.
소망을 본다.
나는 의미를 발견하는 삶이 즐겁다.
시인은 모든 것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시인이 시를 쓰기 위한 자세는, 내가 삶을 대하고 싶은 자세다.
내 꿈은 시인이다.
시 쓰듯이 살고 싶다.
아 물론,
시를 쓸 생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