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홍길동전

독자의 눈치를 보지 않는 고전 판타지가 남긴 통쾌함과 가능성의 고통

By recoen2025-03-02
홍길동전

최근에 드라마 「옥씨부인전」을 신나게 봤습니다. 드라마에 스쳐 지나가는 소재로 『홍길동전』이 나왔는데, 이상하게 그 장면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어렸을 때 만화책으로 읽어본 것 말고는 기억이 없어 이참에 다시 읽어봤습니다.

두껍지 않은 책이었습니다. 짬나는 시간을 활용해 읽어도 이틀이면 족히 읽을 수 있는 분량이었고, 이야기도 빠르게 전개되어 속도감 있게 읽었습니다.

오늘날의 드라마나 웹툰은 독자의 눈치를 살피는 편입니다. 독자 입장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가 나오면 슬쩍 독자의 입맛에 맞게 방향을 바꾼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반면 『홍길동전』은 독자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그저 길동을 앞세워 혼내주고 싶은 이들을 마음껏 혼내줍니다. 갑자기 능력이 튀어나오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부패한 관리들을 정신없게 만듭니다. 어디서 그런 능력이 생겼는지, 관리들이 얼마나 나쁜지에 대한 설명은 별로 없습니다. 혼내주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독자에게 개연성 있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주기 위해 애쓰기보다 길동을 신나게 휘두르는 듯해 속이 시원했습니다. 아주 소설다웠습니다.

이 소설이 우리 조상들의 삶을 배경으로 쓰였다고 생각하니 흥미롭게 다가오는 지점이 몇 가지 더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판타지

그 시대 사람들도 이런 판타지물을 좋아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들에게도 상상력이 있었고, 그것을 활용해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홍길동전』이 고전으로 남을 만큼 당시에도 인기 있는 소설이었다면 비슷한 종류의 소설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상상을 좋아했을 것입니다.

초가집이나 한옥 아래에 앉아 하늘을 날고 은신술과 분신술을 쓰는 상상을 했을 사람들을 떠올려보니 귀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합니다.

가까이 있지만 잡히지 않는 가능성

“소인이 대감의 정기로 당당한 남자로 태어나 부모의 은혜가 하염없이 깊거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어찌 제가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 허균, 『홍길동전』

가능성의 여지. 저는 이것이 정신적 고통을 만들어내는 씨앗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잡히지 않을수록 더 고통스럽습니다. 길동이 바로 그렇습니다. 같은 아버지를 두고도 형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만 자신은 그러지 못합니다. 어쩌면 자신도 형의 입장이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길동의 마음을 더욱 후벼팠을 것입니다. 길동은 천민은 아니었지만 신분상의 차이로 고통받았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천민이 존재했고 면천이라는 제도도 있었습니다. 노비의 신분을 양인으로 바꾸어주는 제도입니다. 한번 천민으로 태어나면 영원히 천민이라고 정해져 있었다면 오히려 덜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천민으로서 겪는 고통은 배고픔이나 추위 같은 물리적인 요소뿐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양인이 아니라서, 양반이 아니라서 느끼는 고통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천민에게는 양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놓여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배고픈 이유와 추운 이유가 ‘내가 천민이기 때문’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삶의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천민에게는 가혹한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

어이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속이 시원하기도 한 소설이었습니다. 동시에 시사하는 바가 있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한 책이었습니다. 어쩐 일인지 저는 이렇게 독후감을 쓰기 편한 책들만 골라 쓰고 있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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