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길 위의 철학자

노동과 독서 사이에서 자신만의 철학을 만든 에릭 호퍼

By recoen2024-07-26
길 위의 철학자

최근부터 책을 천천히 읽자고 마음먹었다. 그렇다고 읽는 속도를 늦춘 것은 아니다. 나는 원래부터 빠른 속도로 읽은 적이 없었다. 그저 많은 책을 읽겠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한 권을 읽더라도 많은 것을 곱씹는 태도를 취하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번에 읽은 책은 에릭 호퍼의 자서전 『길 위의 철학자』다.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도시인의 월든』 덕분이었다. 『도시인의 월든』은 자신만의 고유함을 지키자는 이야기를 하며 저자가 영감을 얻은 여러 책을 소개하는데, 그중 하나가 『길 위의 철학자』였다.

이 책을 읽은 이유

『도시인의 월든』은 에릭 호퍼를 매력적으로 소개했다. 탁월한 철학적 통찰을 지녔음에도 책상에만 앉아 있지 않고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는 점, 내면의 목소리가 울리면 그대로 따라갔다는 점이 마음을 끌었다.

이 단서들로 미루어볼 때, 그는 내가 이상적으로 품은 인간상과 닮아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사람 중 한 명은 디오게네스다. 알렉산더 대왕이 부와 명예를 주겠다고 했을 때에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한 줌의 햇빛뿐이라고 의연하게 말한 사람이다. 인생의 본질을 통찰하고 그것을 당당히 실천할 줄 아는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책상머리가 아니라 노동자의 생활 속에서 인생을 관찰하고, 자신의 눈과 손끝의 감각으로 사유했을 에릭 호퍼는 내가 존경하던 사람들과 어떤 연결점이 있을 것 같았다.

더 나아가 나는 롤모델의 심상을 마련하고 싶었다. 내게는 그리스인 조르바, 니클라스 루만, 디오게네스 등 여러 롤모델이 있다. 이들의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이 가진 특징 가운데 내 마음을 울리는 부분을 본받겠다는 뜻이다.

‘나’라는 존재는 조금씩 그려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리는 선이 분명하고 짙어질수록 나의 존재도 뚜렷해진다. 그 과정에서 도움을 얻기 위해 롤모델을 찾는다. 롤모델은 내 마음속의 하나의 심상이 되어 행동의 기준과 방향을 제시한다.

언젠가 “나는 롤모델 같은 거 필요 없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의미였는지는 자세히 묻지 못했다. 하지만 내게는 배움과 성장이 필요하다. 더 효율적으로, 적절한 방향으로 성장하기 위해 내게는 롤모델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에릭 호퍼는 내게 어떤 롤모델의 심상을 마련해줄까? 그 궁금증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에릭 호퍼가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미친 사람인지 잘 몰랐다. 그저 노동자의 생활을 자처하면서 그 안에서 철학을 해나가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나 또한 언젠가 철학과 가까운 삶을 살고 싶다. 지금은 코딩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에릭 호퍼처럼 개발자로서의 내 삶도 철학을 위한 재료로 잘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책에서 얻은 인사이트

책을 읽으며 크게 인상받은 부분은 두 가지다. 지적인 호기심과 관찰력이다.

지적인 호기심

에릭 호퍼는 지적 호기심이 대단했고 공부가 얼마나 즐거운 행위인지 알았다. 일해서 번 돈을 저축해 미래를 대비하려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일정한 돈이 모이면 일을 그만두고 도서관에 들어가 관심 있는 분야를 공부했다. 정말 독특한 사람이다.

한 번은 토마토 모종을 마분지 상자에 옮겨 심다가 뿌리는 아래로, 줄기는 위로 자라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는 그 길로 일을 그만두고 도서관 근처에 거처를 구해 식물학 책을 읽었다. 며칠 동안 얻은 지식을 뒤로하고 다시 노동자의 생활로 돌아왔을 때에는 농부들에게 전문적인 조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글과 책도 늘 가까이했다. 노동하고 남는 시간에는 생각을 정돈하는 글을 꾸준히 썼고 언제나 읽고 싶은 책을 곁에 뒀다. 한 번은 오랫동안 산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무조건 두꺼운 책을 사기로 하고, 표지도 보지 않은 채 천 페이지짜리 책을 샀다. 그것이 『몽테뉴의 수상록』이었다. 호퍼는 산속에서 이 책을 읽고 또 읽어 외울 정도가 되었고, 주변 노동자들에게 몽테뉴를 설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에릭 호퍼는 켄 베인이 『최고의 공부』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심층적 학습자’다. 심층적 학습자는 학습을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 학습 그 자체를 목적으로 공부한다. 이런 사람들은 학습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추고 다른 분야의 지식과 연결점을 찾는 데 탁월해진다. 분야를 넘나드는 사고 속에서 남다른 문제 해결 능력을 보이는 것이다.

내게 자극이 된 것은 지식에 대한 그의 열정이었다. 사실 나도 대학 시절에는 지식에 대한 열정이 남부럽지 않았다. 돈을 버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었고, 내 인생에는 별도의 과업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과업과 학습은 떼려야 뗄 수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연관 분야의 공부에 몰입했다. 고등학생 때 하던 수능 ‘공부’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책을 읽으며 도파민이 터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새 나는 ‘전략적 학습자’가 되었다. 취업에 도움이 되는 공부, 자본을 불리는 데 도움이 되는 공부를 더 많이 찾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학습 자체의 즐거움을 많이 잊었다. 이런 시기를 보내는 내게 호퍼는 좋은 자극을 주는 인물이었다.

관찰력

호퍼는 남다른 관찰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특히 두 장면이 인상 깊었다.

지역을 옮기며 일자리를 잃었을 때 그는 굶어야 했다. 그런데 자신의 배고픔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굶는 날이 늘어날수록 육체에 어떤 반응이 나타나는지 지켜봤다. 이 행위 자체가 정말 괴짜 같았다. 그러다 우연히 비둘기들이 싸우는 모습을 발견했고, 그것을 관찰하는 동안 배고픔의 고통을 잊은 자신을 발견했다. 그 길로 배고픔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었다. 그날 저녁에는 설거지 일을 구해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또 한 번은 우리나라의 인력사무소 같은 곳에서 매일 일자리를 구하고 일당을 받았다. 많은 사람이 몰려왔기에 나름의 경쟁이 필요했다. 호퍼는 담당자가 어떤 사람을 고르는지 유심히 관찰했고, 여러 가설을 세워 실험하며 일자리를 구하는 데 자신감을 얻었다.

담당자가 일자리의 종류를 불러 주는 데 몇 초가 걸리고, 다시 손을 든 사람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데 몇 초가 걸렸다. 담당자는 특정한 사람을 고르기 전에 마음속으로 어떤 것을 가늠해 볼 시간이 충분치 않음이 분명했다. 따라서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면 외부 세계의 어떤 작용이 필요했다.

그 어떤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면 그 담당자를 생각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보았다. 그러다가 담당자의 눈이 앞의 다섯 줄은 지나치고 여섯 번째 줄의 중간에 머무는 때가 많다는 것과 붉은 종이로 싼 책이 담당자의 주의를 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여러 가지 다른 얼굴 표정을 짓는 일도 시도해 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 때에는 세상에 아무 걱정도 없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명랑한 모습이 담당자의 주의를 끌었던 것이다.

그런 요령으로 나는 하루에도 일자리를 여러 번 구할 수 있는 자신이 생겼다. 안심이 되었다.

—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뭔가 비범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

사실 마지막까지 흥미롭게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중간중간 드러나는 이 사람 특유의 괴짜 같은 면모가 자극적이었다. 그런 장면들을 마음속에 새겨놓고 순간순간 판단할 때 좋은 심상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영감을 받은 인용구들

언어는 질문을 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대답은 투덜대거나 제스처로 할 수 있지만 질문은 반드시 말로 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첫 질문을 던졌던 때부터였다. 사회적 정체는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할 충동이 없는 데에서 비롯된다.

이런저런 것만 있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불행의 원인이 불완전하고 오염된 자아에 있다는 인식을 억누르는 것이 된다. 따라서 과도한 욕망은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억누르는 수단이 된다.

주제 /Philoso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