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건축가의 공간 일기

공간을 사랑하는 방법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다

By recoen2025-05-14
건축가의 공간 일기

저는 좋은 공간에 가면 쉽게 기분이 좋아지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왕이면 늘 좋은 공간을 찾아가고 싶다는 점에서 공간에 예민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공간 감상’이라는 개념은 생소했습니다. 미식과 음악 감상의 세계가 있듯 공간 감상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 낯설었습니다.

최근 맛의 원리를 다룬 책을 읽으며 음식을 바라보는 시선이 넓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건축가가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을 듣다 보면 제 시선도 넓어질 수 있을까. 그런 기대를 하며 『건축가의 공간 일기』를 읽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대와 조금 달랐습니다. 책이 별로라기보다 기대의 방향이 달랐습니다. 제목에 ‘일기’라는 단어가 있다는 점에서 예상했어야 하지만, 책은 공간을 보는 이론적 시선을 넓혀주기보다 부드럽고 따뜻한 에세이를 담고 있었습니다. 무의식중에 저는 공간을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조금은 딱딱한 이론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지나가는 건물을 곱씹어볼 수 있는 지식의 근거를 마련하고 싶었던 것이죠. 다음에는 공간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지식을 설명하는 입문서를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수확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몇 가지 이야기는 공간을 바라보는 제 시선을 더 분명하고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그중 두 가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익명성과 연대감이 함께 있는 공간

첫 번째는 기차역이 지닌 익명성과 연대감의 균형입니다. 공간마다 관계의 거리가 다릅니다. 지하철은 익명성이 짙고 관계의 거리가 먼 공간입니다. 많은 사람이 있지만 서로 소통하지 않습니다. 출근길 지하철은 특히 그렇습니다.

반대로 집이나 회사처럼 연대감이 짙은 공간이 있습니다. 가까운 관계를 누릴 수 있지만 때로는 피곤합니다.

기차역은 다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와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지만 그곳에는 만남과 헤어짐의 드라마가 있습니다. 오랜만의 만남이 주는 반가움과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을 보내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사람들과 거리를 둠으로써 익명성과 안전감을 보장받는 동시에 살아있는 인생의 드라마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익명성과 연대감이 이처럼 공존하는 공간은 흔하지 않습니다.

이 대목을 읽고 제 삶의 반경을 살펴봤습니다. 한강공원이 떠올랐습니다. 돗자리를 깔고 조용히 앉아 있어도 누구도 간섭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옮기면 설렘을 안고 막 도착한 사람들, 치킨을 앞에 두고 건배하는 사람들, 손잡고 걷는 연인, 동아리 친구들과 모인 대학생, 넘어진 아이에게 달려가는 엄마가 보입니다. 음악과 웃음소리도 들립니다.

이런 공간에서는 관계로부터 멀어져 심리적으로 쉴 수 있으면서도 관계의 드라마를 지켜볼 수 있어 아주 외롭지는 않습니다. 익명성과 연대감이라는 시선으로 공간을 바라보게 된 것은 꽤 괜찮은 수확이었습니다.

단골집과 중거리 관계

두 번째는 ‘단골 바가 인생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도시 공간을 연구하는 한 학자는 건강한 도시에 영향을 미치는 여섯 가지 요인 중 하나로 단골 바를 꼽았습니다. 단골 바는 시민의 고독을 치유하고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그곳의 유대감이 도시 전체로 퍼져나갑니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서로의 단점을 알아차릴 정도로 친하지 않은 누군가와의 우정”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관계를 ‘중거리 관계’라고 합니다. 인생에는 이런 관계가 적당히 필요합니다. 너무 가까워도 피곤하고 너무 멀어도 외롭습니다. 언제든 서로 쿨해질 수 있는 적당한 관계가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단골 바입니다.

저도 단골 바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과 나누는 스몰토크의 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삶에 활력을 주고 꽤 괜찮은 비타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술을 잘 마시지도, 잘 알지도 못합니다. 주류 문화가 익숙하지 않고 평생 바에 가본 적도 없습니다. 단골 바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심리적인 장벽입니다.

바는 아니지만 단골 음식점은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사해 자주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사장님은 주방에서 손님을 볼 수 있도록 식당을 꾸몄습니다. 요리하는 곳 앞에는 반찬과 장국이 있어, 반찬을 가지러 가면 반드시 사장님과 마주칩니다. 사장님은 늘 따뜻한 미소로 맞아주셨습니다. 한두 마디를 나누고 밥을 먹으면 가슴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맛이 느껴졌습니다.

식사하다 보면 아르바이트생이 타르타르소스를 얹은 새우튀김을 가져왔습니다. “사장님께서 서비스로 주셨어요.” 갈 때마다 빠짐없이 새우튀김을 주셨습니다. 저는 식사를 마치면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정에 담아 “너무 잘 먹었습니다. 또 올게요”라고 인사했습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두 번 방문했습니다. 이사 전 마지막 식사를 한 날에는 사장님께 “너무 고마운 시간이었다”는 편지도 썼습니다. 이제 그 동네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장소입니다. 어쩌면 저는 그곳에서 사장님과 중거리 관계를 맺었는지도 모릅니다.

언제나 볼 수 있는 ‘아는 얼굴’, ‘또 오셨네요’라는 표정으로 인사해주는 사장님, ‘잘 왔다’고 반겨주는 새우튀김까지. 저는 그곳에서 작은 유대감을 느꼈습니다. 그 시기 마음 한구석이 따뜻했다면 분명 그 단골집 덕분일 것입니다.

어쩌면 이 책은 공간을 사랑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공동묘지를 사랑하는 방법, 긴장감 없는 야구장을 사랑하는 방법, 서울역과 동네를 사랑하는 방법. 그 모든 사랑의 방법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공간을 이론적으로 해석하고 분석하는 틀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공간에서 느껴지는 ‘사람 냄새’란 무엇인지 질문할 수 있는 시선을 얻었습니다. 이 공간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려 하는가? 이곳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이런 질문만으로도 공간을 바라보는 제 시선은 조금 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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